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어 아도르노 (문단 편집) === 신좌파와의 대결과 말년 === 부정변증법은 이제 아도르노의 사유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도르노는 이 변증법을 '악의적인 형태'로 경험해야 했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말은, 자신의 비판이론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상황을 말한다.] 당시 [[베트남 전쟁]]과 냉전군사주의로 인한 핵전쟁의 위협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상시적으로 벌어졌다. 시위가 일어났던 초기에는 아도르노도 학생시위대들과 연대를 표명했었다. 그 해 6월에는 이란의 독재자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팔라비]]가 서독을 방문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한 오네조르크를 추모하기 위해 아도르노는 학생들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묵념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낡은 권위주의적 대학구조 마저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학생들은 학사진행 결정권을 학생들에게도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대학당국, 교수진, 학생회 삼자가 동등한 권한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개혁안이 나오고 있었다.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71)] 강의를 방해하면서 대학의 교원들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아도르노도 권위주의적인 대학구조를 바꿔야 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그는 자아비판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는 것은 스탈린주의적인 것이고, 폭력과 침묵을 강요하는 전술은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학생들을 비난했다. 비판이론은 그동안 파시즘과 선진산업사회의 행정통제시스템 사이의 유사성을 주장해왔지만, 이 역사적 순간에서 아도르노는 국가의 편을 들면서 이 공화국을 파시스트국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맞서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아무리 개선할 점이 많은 민주주의라고 해도,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81]고 경고했다. 여기에다 불을 붙인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하버마스]]였다. 하버마스는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한스-위르겐 크랄을 상대로 한 「대학과 민주주의」라는 주제의 토론에서, 학생들의 급진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반면, 그들의 방법을 문제 삼았다. 그는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혁명을 꾀하려고 하는 것은 '좌파파시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 발언에 분노했지만, 아도르노는 하버마스의 발언을 옹호했다. 그 결과 ㅡ 그 동안 아도르노가 교육개혁에 대해서 말했던 수많은 지지발언에도 불구하고 ㅡ 그는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의 가장 대표적인 표적 중 하나가 되었다. 한 번은 아도르노가 강연할 때 두 명의 학생이 나와서 "베를린의 좌익파시스트들이 고전주의자 테디(아도르노의 별명)에게 보내는 인사"라고 쓴 깃발을 흔들었다. 강연 말미에는 한 여성이 그에게 빨강색 곰 인형을 선물하려고 했다. 실천하지 않는 이론은 인형과 같다는 비꼼이었다.[* 아도르노의 별명이 '테디'(테오도어의 애칭)였는데, 곰 인형 [[테디 베어]]는 이제 그(테디)가 인형이 되었다는 것을 말함.] 나중에 아도르노는 이러한 "폭력적인 행위"로부터 꿋꿋이 버텼다고 진술했다. 이듬해가 되자 상황은 심각해졌다. 한스-위르겐 크랄[* 한스-위르겐 크랄은 아도르노의 박사 과정 제자였으며, 프랑크푸르트 대학 학생운동 조직 SDS의 리더였다. 1968년 1월 학생 시위대가 사회조사연구를 점거할 때 그는 이 운동을 이끌었고, 이 때문에 아도르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크랄과 학생 시위대는 비판이론가인 아도르노가 자신들을 경찰에 신고하여 해산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거꾸로 아도르노는 제자들과 시위대가 우파 기관이 아닌 사회조사연구소를 점거하여 연구와 학술 활동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아도르노는 이후 알몸 퍼포먼스에 충격을 받고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시위 퍼포먼스가 그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몹시 수치심을 느끼며 말년을 보냈으며, 그와 학생운동 진영 사이에 감정적인 간극이 생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도르노가 사망한 다음 해 2월 크랄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한상원 옮김, 에디투스, 2020, p.21~22)]은 학생들의 시위 앞에서도 수업을 강행한 아도르노를 비판했다. 그의 사회학 세미나는 강의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수업거부 외침에 휩쓸려 버렸다. 게다가 크랄이 이끌던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의 시위대가 방 하나를 점령했고, 아도르노와 하버마스는 나가달라고 요청했지만 학생들에게 거부당했다. 아도르노는 건물을 점거하면서까지 자신에게 자아비판에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도르노는 학생시위대를 내쫓기 위해서 경찰을 불렀다. 학생들은 또다시 분노했다. 그들은 "제도가 된 아도르노는 이제 죽었다"고 선언했다. 옛 동료 [[허버트 마르쿠제|마르쿠제]]도 아도르노에게 편지를 보내 학생들의 편을 들었다. 아도르노는 답변에서 이렇게 으르렁거렸다. "마치 그런 모순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들의 폭력적인 태도와 실천은) 내재적 이율배반의 힘을 통해 운동이 변질되어서 반대쪽으로 향하지 않겠나? 나는 매순간 현재의 학생운동이 대학의 기술 관료화를 향해가고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네. 그들은 관료화를 막겠다고 소리치지만, 사실은 그쪽으로 곧장 향하고 있지." 상황은 점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1969년 4월 22일, 아도르노는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유방 테러(Busenattentat)"라고 불리는 이 유명한 사건의 경과는 이렇게 진행됐다. 강의 도중 두 명의 학생이 그에게, 경찰을 부른 것과 크랄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한 것에 대한 사과와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그때 한 학생이 칠판에 이렇게 썼다. "누가 평생동안 자본주의를 유지하게 만들었던 친애하는 아도르노만이 지배하도록 놔두는가."[* "Wer nur den lieben Adorno lässt walten, der wird den Kapitalismus ein Leben lang behalten." [[https://www.studentenbewegung-frankfurt.de/22-04-1969-das-busenattentat/|#]]] 다른 학생들은 소리쳤다. "고발자를 타도하라!" 아도르노는 모두에게 5분의 시간을 줄 테니 강의를 계속할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그러자 긴 가죽 재킷을 입은 세 명의 여성시위자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서 연단 위의 아도르노를 에워싼 채 마치 바바리맨처럼 벌거 벗은 가슴을 노출했다. 그들 중 한 명은 그의 뺨에 립스틱 키스를 시도했고 나머지 둘은 장미와 튤립 꽃잎을 그의 머리 위에 뿌려댔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세 여성은 페미니즘은 물론 운동권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단지 과격파 남학생이 주도한 기획에 행동대원으로 동참했을 뿐이다. 일명 '가죽점퍼 지부'로 불리던 그룹의 남학생이 공동주택 옆방에 살던 여학생을 끌어들인 뒤 그날 아침에 대학 주변의 카페를 돌아다니며 행동에 참여할 여자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세 여자는 모두 서로 초면이었고 그 이후로도 접촉이 없었다. 그리고 그 테러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몰랐다. 옆방에 살던 여학생은 얼마 후 베를린으로 갔고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 여학생은 테러 순간을 찍은 사진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중앙의 여학생이다. 나중에 '죽은 뒤 아도르노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명은 이름을 추적해 어렵사리 연락이 되었지만 신원을 밝히기를 꺼렸으며 당시 유치원 교사였다는 점만 밝혔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74)] 붉어진 얼굴로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그녀들에게서 벗어난 아도르노는 곧장 모자와 외투를 집어 들고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 뒤 자신의 강의를 모두 취소해버렸다. 2주 뒤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아도르노는 자신이 목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저한테 그렇게 하다니. 모든 종류의 성적 억압과 성적 금기에 반대해 온 저한테 말입니다… 그들은 조롱하려고 저에게 히피 복장을 한 세 명의 소녀를 풀었습니다. 그것은 역겨운 일입니다. 그들이 그것으로 달성하는 희극적 효과는 단지 가슴을 드러낸 소녀를 보고 낄낄대는 속물의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이 바보같은 짓은 사전에 계산된 것입니다."[*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75 와 해당 인터뷰 원문[[https://www.studentenbewegung-frankfurt.de/th-w-adorno/|#]] 참조.] 그리고 자신의 철학이 '실천없는 이론'이라는 『슈피겔』의 지적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즉각적인 조치나 변화를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이론은 정확히 변화를 초래합니다. 내가 쓰는 방식(부정변증법)대로 생각하고 쓰는 것도 저항의 한 형태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한 번 쯤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도 진정한 실천의 한 형태가 아닙니까?"[* "Philosophy cannot in and of itself recommend immediate measures or changes. It effects change precisely by remaining theory. I think that for once the question should be asked whether it is not also a form of resistance when a human being thinks and writes things the way I write them. Is theory not also a genuine form of praxis?" [[http://greatwritersfranzkafka2.blogspot.com/2013/03/who-afraid-of-ivory-tower-conversation.html|#]]] 아도르노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와 그의 부인 그레텔은 스위스의 알프스로 휴가를 떠났다. 긴 산책을 하면서 최근에 겪은 시련을 극복하려던 계획이었다. 주치의가 힘든 활동을 피하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는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3천 미터로 올라가 스위스의 산악을 등산했다. 하이킹 도중에 그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날 늦게 스위스 비스프(Visp)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 다음날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